본문 바로가기
관심있는 이야기/글

사회_지독하게 고독하라_혁명과 변화는 그 순간 시작된다

by 지금이순간mom 2016. 1. 31.
반응형
[문명, 인간이 만드는 길- ‘마음’ 전문가들과의 대화](10)장쉰·작가
경향신문 기사본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510022111435&code=210100
문명, 인간이 만드는 길- ‘마음’ 전문가들과의 대화http://news.khan.co.kr/kh_news/khan_serial_list.html?s_code=af159


[문명, 인간이 만드는 길- ‘마음’ 전문가들과의 대화](10)장쉰·작가
기사입력 2015.10.02 오후 9:11
최종수정 2015.10.02 오후 10:05

ㆍ지독하게 고독하라…혁명과 변화는 그 순간 시작된다

현대인에게 ‘고독’은 친숙한 단어다. ‘환희롭다’는 단어에는 고개를 갸우뚱할지 몰라도 ‘고독하다’란 말은 그저 읊조리는 것만으로도 고독감이 스며든다. 그 뜻은 어느새 ‘외로움’이라는 부정적인 감성으로 대치되었다. 세계 인구의 70%가 모여 산다는 도시는 마음 붙이지 못하고 쳇바퀴 따라 도는 개인의 일상을 만들고 있다. 외로움에 주눅들어 눈치껏 타인의 선택에 기대어 하루를 버티게 한다. 그러나 대만의 작가 장쉰(蔣勳·68)은 고독을 통해 세상 살아가는 힘을 키워내자고 설득한다.

■장쉰은 누구

-문학·미학 넘나드는 대만의 ‘정신적 지주’

장쉰(蔣勳)은 시인이자 소설가, 화가, 문학평론가이다. 대만에서 ‘미학의 대가’ ‘대만 문학의 정신적 지주’‘계몽자’라고 평가받는다. 문학, 예술, 미학을 하나로 꿰고 있는 정신적 지주이다. 그는 타이베이시 문화부 장관직을 거절하고 친구인 룽잉타이(龍應台)를 추천하였으며, 작가인 장샤오펑(張曉風)은 그를 ‘마치 살아 있는 신선과 같은 인물’에 비유했다.


푸젠 창러에서 청나라 귀족 출신의 어머니와 농민 출신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가정환경 속에서의 문화적 교류와 충돌의 경험은 미학에 몰입하는 자양분이 되었다. 월간 ‘라이온(Lion)’ 미술잡지 편집장, 둥하이(東海)대학 미술학과장을 역임했고, 현재 ‘롄허(聯合)’ 문학 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저서는 예술평론집으로 <아름다움에 대한 사유> <치바이스(齊白石)> <미켈란젤로 분석> <하늘과 땅에 있는 아름다움> <미(美)에 대학 각성> 등이, 에세이로는 <섬의 독백> <감탄 예찬> <도량과 산>이, 시집으로는 <어머니> <다정다감하게 웃다> <축복> <눈앞에는 바로 그림과 같은 강산> <구 만리 같은 앞길> 등이 있다. 소설로는 <새로운 전설> <감정 조절이 안되다> 등이 있다. 한국에는 <고독육강>(이야기가있는집)이 소개돼 있다.

대만을 대표하는 지성인 장쉰은 “고독은 자신 내면과의 깊은 대화로, 나 자신이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믿게 한다”며 “외부의 요소들, 남이 아니라 바로 내 자신이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게 만든다”고 밝혔다


그는 대만을 대표하는 지성이며,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이름만으로도 설렘을 일으키는 주인공이다. 젊은 날 프랑스에서 미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뒤 소설로 청춘들에게는 세상을 향해 눈을 뜨게 했고, 장년들에게는 그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직시하도록 사유의 길을 틔워 주었다. 만남은 지난 7월 타이베이 보경로에 있는 서점 회의실에서 이뤄졌다. TV 강연으로 대만인들에게 낯익은 그이지만, 최근에는 일절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중국 CCTV의 제안도 거절했다고 한다. <문명, 인간이 만드는 길>과의 인터뷰 응낙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약속 시간 20분 전, 택시에서 내려 올라오는 장쉰의 풍모에서는 그 어떤 권위도, 명성에 부응해 무대에 선 듯한 매너도 보이지 않았다. 담백했다.

안희경(이하 안) = 타이베이 거리에서도 많은 이들이 스마트폰을 보며 다니네요. 세대를 초월해서 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 매달립니다. 어떤 이는 외로워서 그런다고 얘기하고, 누구는 관음증과 자기우월감을 표현하기에 적절해서 빠져든다고 하는데, 선생님의 해석은요?

장쉰(이하 장) = 저도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걸요. 우리는 컵도 쓰고 의자도 씁니다. 컵이 없던 시절에는 손을 모아 물을 마셨는데 컵이 있으니 편해졌죠. 다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어느 날 컵이 사라지면 다시 손으로 마실 수도 있다는 겁니다. 사람과 물질이 어떻게 조화를 이뤄가야 하는가의 문제라고 봐요. 스마트폰에 기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 하지만 요즘 젊은이들에겐 어렵겠죠. 물질과 좀 더 적절한 관계를 유지하도록 천천히 배워야 해요.

안 = 컵이나 의자는 소비하는 물건인 데 비해 스마트폰은 관계를 맺는 도구잖아요. 많은 사람 속에 있지만 관계는 오히려 더 가벼워지니 외롭죠.

장 = 외롭기는 휴대폰이 없어도 마찬가지죠. 예로부터 그리스나 인도, 한국을 불문하고 모두 외로움에 대해 논해 왔어요. 고독은 인간의 본질이라고 봐요. 본래 고독하게 살고 고독하게 죽습니다. 우리는 많은 관계를 맺고 그 안에는 거짓도, 진실도 있어요. 그 가운데 휴대폰에 매달려 대화 상대를 찾는 일은 황량하죠. 아예 고독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어떨까요? 산을 오르면, 며칠을 걸어도 대화할 사람 한 명 없을 수 있어요. 바람소리, 물소리를 듣고 움직이는 구름을 보는 그런 고독으로 들어간다면, 오히려 우리를 아름답게 채워준다고 봅니다.

안 = 홀로 시간을 보내려고 애써온 이들한테는 반가운 격려로 들리겠지만, 이 말에 수긍할 이들이 얼마나 될까요?

장 = 孤(외로울 고)는 孤兒(고아)라는 단어에 사용됩니다. 아빠, 엄마가 없는 아이죠. 獨(홀로 독)은 돌봐줄 이 없는 홀로된 노인을 부르는 獨居老人(독거노인)에 쓰이고요. 이 두 단어는 우리를 애잔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서양의 문자에서는 고독을 solitude(솔리튜드)라고 해요. 어근인 sol은 원래 Sole에서 왔어요. 태양입니다. 유일한 존재. 저는 이 동서의 고독을 연결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아, 독거노인에 외로움이 깃들고 딱한 마음이 일어나듯이 우리에게는 생명에 대한 연민이 있죠. 반면 솔리튜드에는 자긍심이 담겨 있습니다. 그 고독은 개인적인 것으로 오직 한 존재가 품는 존엄이죠. 우리가 건강하다고 지향하는 사회는 모든 상처 입은 이들도 함께 존중받는 곳을 말하는데요. 고아나 독거노인, 소외된 이들의 존엄도 서양의 고독이라는 단어 solitude가 품고 있는 그 자긍심 담긴 위치까지 끌어올려져야 한다는 거죠. 누구나 완전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안 = ‘고독’이란 단어만으로도 절절이 다가오는 느낌은 있습니다. 고독하니까요. 경쟁이 강박이 되고 일상이 된 현대에는 가족과 둘러앉아 먹는 밥상마저도 쓸쓸함을 채우기보다 서러움을 불러올 때가 있어요. 비교되는 사회에서 뒤처지는 느낌을 떨쳐내기 어려운 도시생활입니다. 그렇다고 다 버리고 산으로 갈 수 없는 현실이고요. 인간은 원래 어울려 소통하고 인정받고 싶은 것이 본능 아닐까요?

대만의 작가이자 평론가인 장쉰(오른쪽)과 안희경 재미 저널리스트가 타이베이 보경로의 한 서점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장 = 한국은 유교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죠. 유교문화는 부부, 아버지와 아들, 스승과 제자, 친구 등 관계에서 요구되는 역할이 중요합니다. 중국의 경우는 여기에 또 다른 중요한 전통이 있어요. 도교입니다. 장자와 같은 이들은 늘 말하기를 “천지의 정신으로 왕래하라”고 해요. 바로 고독으로 천지와 이야기하라는 겁니다.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 이전에 먼저 자기 자신과의 행복을 완성해야 합니다. 대부분 원하는 것을 바깥에서 추구할 때 길을 헤매요. 게다가 진정한 대화의 관계가 아니라 주고받는 관계로 변하지요. 석가모니는 오랜 시간 오롯이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보리(菩提·정각의 지혜)라는 단어를 보세요. 이는 우리 스스로와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너무 많은 시간을 ‘나는 어떻게 부모와 지내야 하며 아내, 남편, 아이, 또 직장 사람들과 어떻게 지내야 하는가’에 대해 묻다 보니, 사람들은 너무 세세하게 쪼개져서 스스로가 사라질 지경이에요. 그러다간 자기가 누구인지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저는 오히려 이런 질문을 했으면 좋겠어요. 부모, 아내, 자녀, 상사, 외적인 모든 이가 없다 치고,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묻는 거죠. 거기가 시작점입니다.

안 = 세상은 미처 익숙해지기 전에 바뀌고 있어요. 내가 이 직장을 계속 다녀야 할지도 의문이고, 선택한 전공으로 학위를 받아도 과연 할 수 있는 일이 있을지 불안합니다. 장사하는 분들도 업종 변경을 해야 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요. 세상은 스스로의 힘을 발견하기도 전에 핑핑 돌아가는데, ‘나’의 생각을 찾는 것으로 해결될 수 있을까요?

장 = 서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세상을 다 얻을지라도 스스로를 잃어버리고 어디에서 왔는지조차 모른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저는 부다가야에 여러 번 갔습니다. 2000년 전에 고타마 싯타르타는 이 나무 아래에서 무엇을 알고 싶었을까? 저도 앉아봤어요. 그 자리는 아주 조용하고 고요했습니다. 모든 잎사귀의 움직임이 느껴지기 시작했고 아름다웠어요. 그때부터 오직 순간에만 머물게 됐죠. 오가던 생각들이 딱 끊어진 겁니다. 그저 이 나무와 이 햇빛은 왜 이토록 찬란할까라는 물음만이 차올랐습니다.

안 = 눈가가 촉촉해지셨는데요. 순간을 온전히 느낌으로써 세상과 연결되는 기회를 갖게 된 건가요?

장 = 모르겠어요. 단지 그렇게 느꼈을 뿐입니다. 이는 앎과는 달라요. 저는 영원히 거기에 앉아 있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전에 느끼지 못했던 거죠. 그 순간 내면과 아주 친밀한 대화를 나눴다고 생각해요.

안 = 서구인들도 현재가 이어지는, 생생하게 살아있는 시간을 ‘nowness (나우니스)’라고 표현합니다. 모든 이들이 그런 순간을 경험해 봄으로써 자기 세상이 견고해질 수 있다고 보시나요?

장 = 삶의 한 부분인 지식을 중심으로 발전해가는 세상이 염려스러운 거죠. 이는 또 다른 힘을 배제할 수 있거든요. 느낌의 힘으로 균형을 이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앉아 있는 여기, 오후의 햇볕이 들어오죠. 햇볕은 사실 계속 변하고 있었어요. 바람과 나뭇잎 때문에도 움직여 왔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변화를 감지하는 느낌에 무감해졌단 말이에요. 왜냐하면 빨리 답을 얻고 싶어 하니까요. 한 개의 답만요. 그러기에 과정 역시 못 느끼는 게 아닌가 싶어요.

안 = 잠시 침묵 속에 앉아 있을 때 그곳에 우짖는 새가 있고, 저 멀리 기찻길이 있다는 것을 느낀 경험이 있습니다. 안에서 생명력이 살아났고요. 사실 모든 것과 떨어져 자기하고만 함께함으로써 갖는 그 인식의 힘을 저도 믿습니다. 그런데 외로움이 어색해 고요히 멈추지 못합니다. 나 홀로 속도의 관성을 끊기가 두렵죠. 고독과 외로움의 관계는요?

장 = ‘고독(孤獨)’과 ‘외로움(寂寞)’은 다른 것입니다. 외로움은 고독을 두려워합니다. 고독은 고독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고독은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독한 그 상태가 좋지 않다면 당신은 고독을 두려워하는 거지요. 그것이 외로움입니다. 외롭기 때문에 사람을 찾고 싶어져요. 만약 당신이 햇볕과 바람을 느끼며 나무 아래 있다면, 일종의 만족감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점점 채워지면서 외로움은 녹아내리고 고독은 자신과 더 함께 있고 싶은 겁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받을 수 있는 느낌은 아닙니다. 1972년 파리 유학시절에 접한 연구조사가 있어요. 파리에 있는 홀로 사는 사람을 조사했더니, 그들은 집에 오면 습관적으로 텔레비전을 켠다고 해요. 하지만 다들 보지는 않는다 합니다. 그저 소리와 화면이 필요했던 거죠. 혼자 있기 두려워서요.

안 = 채워지지 않아 헤매는 그때, 어떻게 스스로와 만나는 고독으로 나아가죠?

장 = 우리가 자기 몸을 극도로 세게 감싸안을 때는 극심한 외로움을 느낄 때입니다. 이때 내 손으로 감쌌지만 그 손에서 전해지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손길이 닿는 몸의 부분 부분이 조금씩 풀려요. 어루만지는 그 터치 속에 평온이 채워져 옵니다. 우리는 내 몸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타인의 몸을 통제하려 하니 대개는 더 외로울 수밖에요.

안 = 선생의 책 <고독육강>(이야기가있는집)에서는 혁명의 고독까지 얘기했습니다. 고독이 대체 얼마나 힘이 있길래 혁명과 고독인지요?

장 = 철학가나 사상가, 예를 들어 보들레르나 장 폴 사르트르, 미하일 바쿠닌 같은 이들이 제시한 관점은 주류 사회에서 세속적인 잣대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지요. 저는 그런 고독감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최초로 지구는 둥글다고 한 사람도 아주 고독했습니다. 그들의 신념에는 당연히 당대의 불평등을 담아내는 핵심 주장들이 있습니다. 아주, 아주 외로웠을 거라 믿어요.

안 = 고독 속에서 진리를 찾고 고독하게 진리를 행동하자는 건가요?

장 = 오늘 우리의 질서는 과거의 습관입니다. 이미 깊게 배어 있지만 질서는 바꿀 수 있어요. 혁명의 고독은 일반적인 항쟁의 혁명만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세상과는 다른 자기의 눈이 떠지는 그것을 알아가는 데서 시작됩니다. 특히 변화 초기는 지독히 고독하죠. 새로운 아이디어, 하나의 개념이 나올 때는 상당히 고독합니다.

안 = 선생께서는 1%의 반항이 사회에 균형을 준다고 했습니다. 저는 한 사회가 균형을 잃고 쏠려 있다면, 과거 회귀나 파시스트적인 억압을 한다면, 거기에 목숨걸고 대항하며 고공으로 올라가는 시위 또한 기울어진 추를 중앙으로 가져오는 작용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어떻게 밸런스를 찾아갈 수 있는 걸까요?

장 = 매우 어려운 질문이에요(웃음). 사회의 균형을 이루려면 시간을 길게 두고 진단해가는 집요한 ‘사고(思考)의 고독’이 필요합니다. 모두가 각기 다른 자기 생각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죠. 저는 인도의 장님 코끼리 만지는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는데요. 여러 장님들이 코끼리를 만졌지만 완전한 코끼리를 표현할 수 없었죠. 코 만진 사람은 코가 어떻더라, 다리 만진 사람은 다리가 어떻더라… 의견이 분분했죠. 옆에서 보던 눈 뜬 사람들은 비웃었어요. 한 사람, 한 사람이 만진 건 그저 부분에 불과하니 논쟁에서 이겨봤자 결론은 모두 틀리니까요. 전 우리 사회 또한 그렇지 않을까 싶어요. 사실 이 이야기에서 가져와야 할 것은 모두가 자기가 만졌던 그 한 부분을 말할 수 있었더라면 비교적 완전한 코끼리에 다가갈 수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사회 속에서 개개인이 자신이 만진 것이 무엇인지 용감하게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이 틀렸다고 말해도 괜찮아요. 용기를 내세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만졌는지도 귀 기울여야 합니다.

안 = 대만의 해석이 조금 다르네요. 내가 만진 것이 다가 아니니 믿지 말자는 뜻으로 통용되는데요.

장 = 여기도 그러할 겁니다. 이 이야기는 우선 우리가 틀렸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우리가 본 것이 완전하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두 번째는 우리가 본 것 역시 맞구나입니다. 왜냐하면 코는 코니까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의 의견과 결합시켜야 하는 거죠.

안 = 네, 누구나 자기 뜻을 말할 수 있는 그 분위기가 바로 민주주의가 작동되는 조건이겠지요. 권위적인 사회는 소신을 말하기 두려우니 초기에 바로잡을 수 있는 일이 대형 참사로 이어집니다. 한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이죠. 입을 연 사람이 책임까지 져야 한다면 모두 입 닫고 무관심으로 돌아설 수밖에요. 용기를 북돋는 시스템이 먼저 되어야 하는데, 이도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일까요?

장 = 당연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도 중요한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이 깊게 사고해야 한다는 겁니다. 제가 자란 대만 사회는 아주 유교적이었어요. 문제를 토론할 수 없었어요. 약자들은 한 개의 답안만 완성하도록 강요받았습니다. 제가 걱정하는 것은 어릴 때부터 사고하지 않는 것이 습관화되고 답을 받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아예 사회적 습관이 돼 개인은 생각하려 들지 않는 분위기가 되는 것. 남의 생각에 길들여지지 말자는 겁니다.

안 = 지금은 미디어가 답을 주고 시장이 답을 줍니다. 소비로 ‘나’를 증명하도록 부추기죠.

장 = 맞습니다. 소비사회. 지금의 자본주의죠. 그래서도 개인의 사고는 중요합니다. 저는 어렸을 때 가정에, 학교에 대항했던 거 같아요. 제가 지금 대항하는 대상은 이 자본사회일 겁니다. 텔레비전 등은 매일 우리에게 무언가를 줍니다. 사실 그건 권위적인 압력과 같은 겁니다. 과거에는 권위적인 압박은 정치적인 거라고 오해했죠.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건 하나의 체제입니다. 바로 자본주의 사회의 체제이고, 그 자체가 바로 권위적인 압박인 거죠.

안 =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는 길은요?

장 = ‘떠나라! 이 주류사회로부터 고독하게 돌아서라.’ 고독해진다면 거부할 수 있어요. 저희 집에는 텔레비전이 없습니다. 거부할 수 있는 거죠. 천천히 사람들이 알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사회, 이런 소비형식을 거부할 수 있다고요. 미국 아이오와주 어느 도시에서는 시민들이 스스로 야채를 심고 수확해 자기들끼리 사고팝니다. 정부에 세금을 내지 않습니다. 이도 그들의 대항이라고 봐요. 미약하지만 그래도 그 안에는 엄연한 힘이 존재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무지의 소비에 대한 문제에 대항하기 아주 어려운 처지예요. 생각하는 개인의 힘은 매우 큰 작용을 만들어낼 겁니다. 적어도 광고가 주는 답의 영향에서는 벗어날 수 있으니까요.

안 = 내면의 힘을 단련하는 법이 고독을 통해서 이뤄진다는 건가요?

장 = 고독은 원래 하나의 기량을 키우는 요소입니다. 스스로와 함께함으로써 자신이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을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외적인 세계가 계속 변하고, 많은 정보가 몰려와도 평온하게 판단할 수 있고 선택할 수 있을 겁니다. 남이 아닌 내가 판단하고 선택하는 거죠.

안 = 고독이… 그러니까 끊임없는 자기와의 대화를 시작으로 세상을 사유해 나가며 나와 남의 존엄을 위해 행동한다면 현재의 문명은 구제될 수 있을까요?

장 = 금강경의 한 구절입니다. ‘實無衆生(실무중생) 得滅度者(득멸도자), 실로 한 중생도 멸도를 얻은 적이 없다.’ 저는 해석은 잘 못합니다만, 그래도 이 경구를 전하고 싶습니다. 요즘 금강경을 읽으며 많은 깨우침을 얻어요. 전에는 불교는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라 여겼어요. 붓다가 나타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 생각했죠. 그런데 석가모니는 제자에게 이렇게 말했다는 거예요. “나는 그 어떤 사람도 구할 수 없다.” 그는 중생을 제도하지 않았다고 했어요. 아마 세상의 그 어떤 삶도 온전히 아름답지만은 않을 겁니다. 많은 곳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사람들이 죽어가죠. 우리는 미력합니다. 어찌할지를 모르지요. 예전에 저는 쉽게 감성에 빠졌어요.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저는 스스로에게 이 말을 하죠. ‘실무중생 득멸도자’, 세상에 생사(生死)는 있다는 거죠. 저는 스스로 더 지극히 고요해지기를 바랍니다.

안 = 뉴욕에서 숭산 스님의 제자이자 심리치료사인 리처드 슈랍(우광)을 인터뷰한 적이 있습니다. 맨해튼 빌딩숲에 있는 그 사무실에서 무엇을 참구하느냐고 물었더니 ‘세상의 가진 자는 왜 더 가지려고 가난한 이의 몫을 탐할까? 강대국은 왜 약소국을 침략할까?’를 참선한다 했습니다. 당시는 월가를 점령하자(Occupy Wall Street) 운동이 강제 진압되던 때였어요. 그의 화두가 반가워 ‘답을 얻었느냐’고 물었죠. 그는 엄숙히 말했습니다. ‘나 한 사람이 고요해질 수 있다면, 세상의 추는 고요 속으로 조금 더 옮겨가지 않겠느냐’고요. 허무나 외면이 아니라 더 치열히 자기 삶에 충실하겠다는 차가운 열정으로 다가왔습니다.

장 = 잘은 모르지만, 저 경구 안에는 생명에 대한 매우 큰 존중이 담겨 있다고 생각해요. 한 생명이 생명을 다스리는 것은 아니라는 거죠. 아직 제 답을 구한 것은 아닙니다. 사르트르의 소설 <벽(Le Mur)>을 이야기하고 싶어요. 레지스탕스이던 그는 잡혀가서 총살을 언도받습니다. 그리고 벽을 마주합니다. 자신과 대면하는 거죠. 사르트르 역시 말합니다. 그 공포와 그 죽음을 나눌 사람은 없다고요. 오로지 한 사람, 홀로 그것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안 = 고독 역시 무섭지만 스스로 내디딜 수밖에 없는 길이네요.

장 = 네. 고독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두려움은 외로움과 황량함을 부릅니다. 하고자 하는 그 일을 하면 됩니다. 모두 용기 내시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문명, 인간이 만드는 길>은 답을 주기보다 독자가 물음을 가져가길 바라며 만든 기획이다. 스스로와 대화하도록 자극을 주고자 했고, 그 길만이 전체의 성숙한 선택을 불러온다 믿었기 때문이다. 장쉰과 대화를 마치며 담아온 것은 대부분 답이라기보다는 물음이었다. 질문하는 ‘나’ 역시 선명한 답에 길들여졌기에, 그와의 대화는 두 달여를 품고 있어도 안갯속이었다. 결국 살아가는 것일 터이다. 삶의 답은 살아가는 것이기에 그가 말한 ‘사고(思考)의 고독’을 마음에 새기는 것이 최선의 길이 아닐까 싶다. 사자처럼 강한 눈빛과는 대조를 이루는 그의 온화한 미소가 오늘도 모두의 사유를 기다린다.

<글 안희경 재미 저널리스트 | 통역 김가원 국립대만사범대학 강사 | 사진 장준희 포토저널리스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510022111435&code=210100

반응형

댓글